입추(立秋)가 지났다. 강물에 가을 빛이 어린다는 절기이지만, 가만히 있어도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 없다. 간들간들 살핏한 부채 바람으론 무더위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. 정말 어지간한 여름 더위이다. 하지만 더위 속에 언뜻언뜻 묻어 있는 서늘함은 어쩔 수 없는 변화이다. 그만큼 대 자연의 질서는 엄중하다. 이런 날 조용히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면 생각보다 다른 맛이 있다. 더위 탓에 문향(聞香)이야 없는 듯하지만, 화하고 소쇄한 기운이 목젖을 희롱하며 살며시 다향을 피운다. 건듯 시원한 솔바람이 입안에 가득하다. 온화한 차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면 어느덧 서늘하고 경쾌한 바람이 일렁인다. 오호라! 여름철 차 마시기 일격(逸格)을 이루었구나.
여름 답사로 운길산 수종사를 다녀왔다. 이곳은 초의선사의 체취가 묻어 있는 곳으로 유서 깊은 차 유적지이다. 근자에 만든 삼정헌(三鼎軒) 다실에서 남한강과 북한강, 두 물이 합류되어 흐르는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다. 뿐만 아니라 나한전과 산신각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, 일명 수종사 다보탑이라는 팔각 오층탑이 오랜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. 특히 돌 틈에서 흐르는 석간수는 물 맛 좋기로 이미 소문이 자자하다. 지금은 부처님께 올리는 청정수로만 사용하고 있단다. 십여 년 전인가 아는 스님이 이곳에 잠시 머무른 인연으로 이 석간수를 조사했던 기억이 새롭다. 그때는 아직 수종사가 정비되기 전이어서 퇴락한 모습이었으나 산신각과 나한전 두 건물이 작고 소박하여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새롭다. 소임 맡은 분께 전후 사정을 말씀 드리니 부처님께 올리고 남은 물이 조금 남았다며 배려해 주었다.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내린 뒤라서 물맛을 보기엔 역 부족이었다. 수종사 종루에서 바라보면 아스라이 다산 정약용선생이 해배(解配)되어 돌아와 천명(天命)을 다했던 곳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.
지금은 새 길을 따라 차를 이용할 수 있지만 옛날에야 불이문을 지나 지금은 도(道)나무로 지정된 은행나무 아래 산길을 다박다박 올라 왔 으리라.
수종사야 전설 같은 세조와의 인연이 자상(仔詳)하거니와 조선의 문객(文客)들이 이 같은 경승지(景勝地)를 모를 리 없다. 서거정, 김종직, 이이, 이덕형 등 낯익은 명사(名士)들, 수종사 경승(景勝)과 승유(僧儒)간에 정분(情分)을 남겼거니와 아무래도 정약용과 초의선사 그리고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과 대를 이은 교분만 하겠는가. 초의선사가 수종사를 그리며 지은 시도 두어 편 남아 있고, 배를 띠워 풍류를 즐기던 정회(情懷)도 아련하다. 수종사 회포 못내 아쉬워 유산에게 보낸 화답(和答) 시에 이렇게 말했다.
아득한 가을 하늘 기러기 머리 돌려 / 천리 길 편지 물고 벽해(碧海)를 건너 왔네. / 남북으로 쌓인 정회, 막힌 지 오래건만 / 그 간에 세월, 몇 번이나 돌았던가. / 연 삼일 내리던 눈, 절 누각에서 감상했고. / 초수에 배를 띠워 함께 더위를 식혔었지. / 옛 자취 아련하여 잊은 듯도 하였건 만은 / 새로 보낸 시를 보니 찹찹한 마음, / 문득 옛 생각이 간절하다.
霜天渺渺雁回頭 / 千里含書碧海秋
南北襟懷常阻展 / 中間歲月幾周
寺樓賞雪連三夜 / 苕水納凉共一舟
陳跡依如可忘 / 新詩觸更添愁
동아시아 차 문화 연구소 소장